시집 ‘나비떨잠’ 출간 기념회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한 유가형 시인(앞줄 가운데 한복 차림).
유가형 시인
유가형 시인은 쉰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지만, 그의 문학적 발자취는 여러 곳에 시비로 남아 있다. 고향인 경남 거창군 수승대 가는 길목에도 유가형 시비공원이 조성돼 있다.
대구작가콜로퀴엄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는 초대 도서관장을 맡아 책과 사람, 문학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문단에서 그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시만이 아니다. 평생 어려운 이웃을 보듬어 온 ‘봉사하는 시인’이라는 이름이다. 올해 만 80세를 맞았지만 그의 삶에는 여전히 청년 같은 열정이 흐른다.
1985년부터 생명의전화 상담 봉사에 참여한 그는 야간 상담을 맡을 사람이 부족해 30년 가까이 밤을 지켰고, 이후에도 10년가량 낮 상담을 이어 갔다. 수많은 사람의 절망과 고민을 들으며 오히려 자신이 삶을 배웠다고 한다.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었다.
그의 나눔은 생명의전화에 그치지 않았다. 30여 년 전 충북 음성 꽃동네를 찾았을 때 입구에 새겨진 ‘얻어먹을 힘만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문구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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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꽃동네와 인연을 맺고 편도 네 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작은 티코 승용차로 달리며 20여 년 동안 봉사를 이어 갔다.
소록도 중앙공원에서는 교회 장로에게 한센인들의 삶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렸다. 먼 나라의 아이들에게도 마음을 열었다. 방글라데시의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사연을 접한 뒤 친구 세 명과 함께 두 아이를 10년 동안 후원했다. 그에게 나눔은 국경과 거리를 가리지 않는 삶의 방식이었다.
이러한 공로로 정무장관 표창과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대구시민상, 오운문화재단 우정선행상 등을 받았다. 하지만 상을 받는 것으로 그의 나눔은 끝나지 않았다. 우정선행상 상금 1000만원에 사비 300만원을 보태 모두 1300만원을 대구 생명의전화와 불우학생 장학금, 소록도 환자 지원, 홀몸노인 생활비, 고향 거창군 중산리 마을회관 등에 전달했다. 받은 것을 다시 이웃에게 돌려준 것이다.
문학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대구 도동 시비동산을 비롯해 거창 중앙공원, 대구 북구 운암지, 칠곡군 석적읍 호국평화광장 등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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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시작한 시인의 길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 돌에 새겨진 셈이다.
그의 기억 속에는 고향의 어린 시절도 선명하다. 1912년 개교한 거창 위천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졸업 60주년 동창회에서 옛 친구들과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친구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얼싸안았다. “귀녀야, 용근아. 살아 있었구나!”라는 외침에는 긴 세월을 건너온 우정과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가설교실에서 2부제 수업을 받던 시절을 떠올렸다. 학교를 지을 때는 집에서 대야를 가져와 모래와 자갈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운동회 때면 생솔가지로 교문을 꾸미고, 빈 파리약통에 물감을 넣어 불어 가며 무늬를 만들었다. 가난했지만 함께 땀 흘리며 꿈을 키웠던 시절이었다.
유가형 시인에게 문학은 아름다운 시를 남기는 일이요, 봉사는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의 시비가 여러 곳에 서 있지만, 어쩌면 가장 오래 남을 시비는 그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세워져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눔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덜어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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