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 사건 당시 행사장 단상의 모습.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와 김대중<29>
“납치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박정희는 문세광의 저격으로 숨진 부인 육영수의 장례를 치른 뒤 처남 육인수에게 이렇게 토로하며 비통해했다(월간 ‘신동아’ 1987년 11월호 육인수 증언.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에서 재인용).
이 연재의 프롤로그에서 박정희와 김대중 사이에 끈질기게 이어진 운명적 관계를 이야기한 바 있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자행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꼭 1년 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의 8·15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벌어진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 육영수 여사 절명도 그 운명적 관계의 한 부분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1년 뒤 발생한 박정희 저격사건
두 사건의 인과관계를 둘러싸고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박정희 자신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없었더라면 아내를 잃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문세광 사건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결과 발표에서는 이러한 맥락을 찾아볼 수 없다.
1973년 8월 8일 도쿄의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낳았다. 한국의 정보기관 요원들이 일본 영토에서 야당 지도자를 납치한 것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중대 범죄였다. 일본 정부와 언론, 정치권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고 한일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1973년 도쿄에서 발생한 납치사건 후 서울로 돌아와 자택에서 수액주사를 맞고 있는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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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료사진
그 파문은 재일동포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정부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도 유신체제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문세광도 그런 흐름에 뛰어든 젊은 세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51년 12월 일본 오사카에서 석면 제조업자 문병태와 육말린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성씨가 훗날 자신의 저격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육영수와 같은 육씨였다.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문세광은 학급위원을 맡고, 동맹휴학 등 학생들의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일성 선집’ ‘마오쩌둥 어록’ 등 좌파 서적도 읽었다. 당시 일본은 신좌익운동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고 문세광도 영향권에 있었다. 문세광은 이 무렵 오사카부 사회과학연구회에서 세이카 여고의 고바야시 미키코를 만났다. 조선 문제와 천민해방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일본 남성 요시이 유키오과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요시이 미키코로 이름이 바뀐다. 훗날 문세광이 자신의 남편 이름으로 한국 입국용 위조여권을 발급받도록 도와준다(조갑제, ‘박정희 11’ 등 참고).
문세광은 고교 2학년 때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를 중퇴한 뒤 민단(재일조선거류민단) 이쿠노지부에 가입해 산하 청년조직인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이후 민단 내부의 주류·비주류 갈등 과정에서 비주류 입장을 취하면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관계자들과도 가까워졌다. 훗날 문세광의 범행을 지원한 혐의를 받은 조총련 오사카 서지부 정치부장 김호룡도 이 무렵 알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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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범 문세광은 좌파 성향에 적극적인 반유신 활동
박정희의 3선개헌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던 문세광은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에서 결성된 ‘김대중 구출위원회’에 적극 참여하고 반유신 활동도 벌였다. 오사카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거하고 영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아 김대중과 교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 같은 활동으로 한국 정보기관의 요시찰 대상이 됐다. 이미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그의 신상에 대해 상당히 깊게 알고 있었던 배경이다.
특별수사본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세광이 박정희 암살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 10월 하순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여가 지난 시.이었다.
문세광이 요시이 유키오의 이름으로 작성한 여권신청서. 문세광의 사진이 붙어 있다. 그는 위조여권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세광은 1974년 7월 오사카의 한 경찰 파출소에서 권총 두 정과 실탄을 훔친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요시이 미키코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위조여권을 마련하고, 8월 6일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훔친 권총 하나를 여행 가방 내용물 중 트랜지스터 라디오 안에 숨겨 들여왔다.
서울 조선호텔 1030호실에 투숙한 문세광은 8월 15일 아침 호텔에서 빌린 검은색 고급 승용차를 타고 광복절 경축식이 열리는 장충동 국립극장에 도착했다. 행사장 출입비표도 없었지만 일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며 외국인 귀빈 행세를 해 검문을 통과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장에 권총을 소지한 신원 불명의 인물이 별다른 제지 없이 들어간 것이다. 경찰 요원의 안내를 받아 빈 좌석에 앉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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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23분쯤 박정희가 경축사를 읽고 있을 때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객석 뒤편에 앉아 있던 문세광이 권총을 꺼내는 과정에서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 자신의 허벅지를 쏜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을 향해 내달리면서 다시 총을 발사했다. 그 총탄은 박정희가 서 있던 연설대에 맞았고 순간 박정희는 연설대 뒤로 몸을 피했다.
그 뒤 몇 차례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객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단상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고, 합창단원으로 참석한 여고생 장봉화는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장시간 수술을 받았지만 오후 7시쯤 숨졌다.
공항 검색대 통과한 권총, 비표 없이 들어간 행사장...난무하는 음모론
중앙정보부 6국과 검찰, 경찰로 구성된 특별수사본부(본부장 김일두 서울지검장)의 수사에 허。이 많아 사건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넘도록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남아 있다.
첫 번째는 문세광의 입국과 경축식장 입장 과정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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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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