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의 가을’이 유럽을 휘감고 있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주거권 보장 시위는 열악한 교육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프랑스 고등학생들의 분노와 맞닿아 있다. 벨기에·포르투갈·알바니아·그리스·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에서 물가 폭등과 복지예산 삭감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대규모 시위 뒤 약탈과 방화가 이어진다. 불안한 치안의 원인으로 불법 이민자가 지목된다. 불타는 거리에서 유럽의 극우가 웃고 있다.
2026년 9월23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경찰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노인을 집에서 끌어냈다. 법원의 결정에 따른 강제퇴거 조치다. 87살 여성 마리아 델 카르멘 아바스칼이 1956년부터 70년간 살아온 아파트에서 내몰린 사연은 ‘전형적’이다. 만성적인 부동산 공급 부족에 시달리는 스페인은 정부가 소유한 공공주택 규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인 전체의 2~3%에 불과하다. 관광객 상대 단기임대 선호 현상도 주택 공급 부족을 부추겼다. 그 틈을 비집고 대형 부동산투자 회사들이 아파트를 대거 사들인 뒤 임대료를 대폭 올리며 주거권 위기를 더욱 키우고 있다.
월세 폭등, 주거권 위기 커져
애초 개인 소유였던 아바스칼이 살던 집도 2018년 대형 부동산투자 회사가 매입했다. 회사 쪽은 기존 500유로(약 74만원)였던 월세를 2970유로(약 442만원)로 6배 가까이 올렸다. 연금생활자인 아바스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긴 소송 끝에 법원은 결국 회사 쪽 손을 들어줬다. 경찰에 끌려나오는 아바스칼의 모습은 급등하는 임대료 탓에 주거권 불안에 시달려온 민심에 불을 지폈다. 9월26일 마드리드세입자연합 등 주최 쪽 추산 약 30만 명이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모여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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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는 스페인 전역으로 퍼졌다.
좌파 연정을 이끄는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소속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PSOE) 주도로 주거권 보장을 위한 긴급 법령 2건이 마련됐다. 취약계층 세입자의 강제퇴거를 2030년까지 잠정 유예하는 한편, 단기임대 주택에 대한 세금 인상과 사기업의 투기성 부동산 매입을 제한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하지만 10월2일 의회에서 제1야당인 우파 인민당(PP)과 극우파인 복스(VOX)가 “정부의 부동산 시장 개입 반대”를 내세워 이를 부결시켰다. 결국 산체스 총리는 10월5일 의회를 해산하고 11월29일 조기총선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강제퇴거 직후 탈진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입원 치료를 받던 아바스칼은 10월7일 끝내 숨졌다. 스페인 일간 엘파이스가 10월9일 공개한 최신 여론조사 결과, 다가오는 조기총선에서 인민당과 복스가 과반의석(176석)을 훌쩍 뛰어넘는 198석을 얻어 집권에 성공할 것으로 예측됐다. 주거권 보장을 내건 조기총선이 자칫 2018년 집권한 산체스 총리 정부에 대한 ‘심판 선거’로 흐를 수 있다는 뜻이다.
2026년 10월17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중심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내걸린 대형 그림에 주거권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른 마리아 델 카르멘 아바스칼(87)의 모습과 함께 ‘인민에게 권력을’이란 구호가 적혀 있다. REUTERS
‘비스밀라, 세 레 테네브르.’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만나 시위대의 으뜸 구호가 됐다. ‘비스밀라’는 ‘비스밀라히 라흐마니 라힘’, 곧 ‘자비롭고 자애로운 신의 이름으로’란 아랍어의 줄임말이다. 무슬림이 기도하거나 어떤 행동을 시작할 때마다 쓰는 관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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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레 테네브르’는 프랑스어로 ‘이것은 암흑이다’란 뜻이다. 아랍어와 프랑스어의 어색한 만남은 2026년 9월18일 프랑스 수도 파리 외곽 크레테유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교육권 보장 촉구 시위에서 비롯됐다.
10월 초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소셜미디어(스냅챗) 비공개 대화방에 알제리 국기와 ‘마마두’란 아랍어 이름을 내건 사용자가 접근했다. “학교 봉쇄는 언제 하느냐. 다 때려 부수자”는 말과 함께였다. 보통의 프랑스 청소년은 사용하지 않는 어설픈 표현이었다. 계정 사용자들은 ‘경찰’을 의심했다. 시위 학생들은 아랍계 이민자는 폭력적일 것이란 차별적 인식이 담긴 이 표현을 되레 기성세대를 조롱하는 구호로 삼았다. ‘신의 이름으로, 이것은 암흑이다.’
“프랑스가 역사적인 구매력 위기에 직면했다. 2019년 이후 실질임금은 지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이례적 현상이긴 하지만, 오랜 기간 이전소득(정부나 비영리단체가 지원한 재화와 서비스 또는 현금)과 자산소득(이자·배당·임대 등을 통한 소득)이 임금과 구매력의 간극을 메웠다. 하지만 2025년과 2026년엔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9월30일 이렇게 보도했다. 196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실질구매력이 떨어진 사례는 단 두 차례다. 긴축재정을 강조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집권기인 1983~1984년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역시 긴축재정에 집중했던 2010~2013년이다. 신문은 “2019년 이후 임금상승률은 18.7%에 그쳤지만 물가는 21.3% 급등하면서 구매력 감소로 이어졌다. 2024년 이후 4인 가족 기준 가구당 평균 구매력은 연간 1200유로(약 178만원) 줄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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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의 여파로 원유 가격이 치솟으면서 9월 물가인상률은 3.4%를 기록했다. 일상이 버거워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재정 파탄, 물가 폭등…
OECD는 2026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을 약 51.4%로 내다봤다. 프랑스 경제재정부는 2026년 GDP 대비 자국 공공부채 비율을 119.3%로 전망했다. 공공부채 규모는 약 3조5955억유로(약 5333조9천억원)에 달한다. 재정적자도 유럽연합(EU) 권고 수준인 GDP 대비 3%를 크게 웃도는 5.1~5.4%에 이른다. 10월 기준 프랑스 10년물 국채 금리는 5%대까지 치솟았다. 국채 금리가 이 상태로 유지된다면 프랑스가 부담해야 할 연간 국채 이자만 약 740억유로(약 109조8천억원)에 이른다. 열악한 교육환경은 파탄 난 재정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정부의 임금 동결 움직임에 맞서 10월6일 교사 등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10월17일과 18일 프랑스 전역에서 50만 명 이상이 교육 불평등과 물가 폭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끝난 뒤 ‘복면 괴한’들이 파리 중심가를 포함해 전국 대도시에서 약탈과 방화에 나섰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파리 등 주요 도시에 야간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군병력까지 동원해 모두 2500여 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주말 대규모 시위를 멈추지 않을 기세다. 2027년 4월18일 프랑스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2017년 집권한 마크롱 대통령은 3연임 제한에 따라 출마할 수 없다. 로이터 통신이 10월14일에 보도한 최신 여론조사 결과, 극우파인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후보가 지지율 37~38%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를 기록한 좌파정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후보의 지지율은 18~18.5%에 그쳤다. 불만과 불안이 유럽 극우의 먹잇감이 된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