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린 호수 '스피릿 아일랜드'에서 보이는 풍경?밴프,재스퍼 국립공원 내에 있는 많은 빙하 호수 중 가장 아름다운 호수이며 유람선을 운영한다. 유람선으로 30분쯤 들어가면 '스피릿 아일랜드'가 있으며 이 섬에 상륙하여 섬을 둘러보았다.
ⓒ 한진석
로스앤젤레스를 벗어난 8기통 5000cc 포드 트럭의 계기판은 쉼 없이 숫자를 밀어 올렸다. 이번 여정의 첫 번째 승부처는 알래스카로 들어서는 관문인 캐나다 로키산맥과 유콘 준주를 돌파하는 일이었다. 북위 34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캐나다 국경을 넘어 북위 51도 밴프까지, 한반도로 치면 여수에서 백두산까지 거리의 세 배를 사흘 만에 치고 올라갔다.
사흘간 창밖의 식생과 기후는 요동을 쳤다. 라스베이거스를 지날 땐 차창을 녹일 듯 섭씨 40도를 웃도는 사막의 열기가 쏟아지더니, 몬태나의 광활한 곡창 지대를 지나 캐나다 밴프에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두툼한 .퍼를 꺼내 입어야 하는 서늘한 가을 날씨로 표정을 바꿨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꼽히는 '아이스필즈 파크웨이(Icefields Parkway)'. 밴프와 재스퍼를 잇는 230킬로미터 도로 좌우로 깎아지른 로키의 준봉과 청옥빛 에메랄드 호수들이 융단처럼 펼쳐졌다. 유람선을 타고 들어간 멀린 호수의 '스피릿 아일랜드'는 설산과 침엽수가 병풍처럼 둘러선 태고의 성소였다.
그림 같은 풍경 앞 벤치에 걸터앉아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익혔다. 만년설의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들이켠 얼큰한 국물 한 모금. 호사스러운 만찬이 부럽지 않은 소박한 충만함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알지 못했다. 이 평화로운 로키의 낭만이 끝나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숨 막히는 권태와 생사를 넘나드는 벼랑 끝 사투였다는 사실을.
▲ 멀린호수 산책로에 있는 야외식탁.?이동 중 。심은 주로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아침 출발 시 보온병에 물을 채워 풍광이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소풍처럼 컵라면으로 .심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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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마주한 집채만 한 곰
재스퍼를 뒤로 하고 알래스카 하이웨이에 바퀴를 올리자 절경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시야를 메운 것은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지루하게 반복되는 털북숭이 침엽수림, 즉 끝없는 '타이가(Taiga)'의 늪이었다.
첫 번째 위기는 포트넬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찾아왔다. 하루 1000km 주행의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숙소 인근 공원으로 가볍게 산책을 나섰을 때였다. 인가 근처라는 생각에 방심하고 차에 곰 스프레이를 두고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호젓한 숲길 모퉁이를 도는 순간, 불과 10여m 앞 수풀 속에서 집채만 한 검은 곰 한 마리가 불쑥 머리를 쳐들었다. 순간 척추를 타고 얼음장 같은 전율이 곤두섰다. TV 화면 너머로 보던 동물원의 곰이 아니었다.
▲ 곰스프레이와 베어 혼(곰 퇴치용 에어 경적)?여행하는 동안 산책이나 트래킹할 때는 곰스프레이와 베어혼을 항상 소지하고 곰 공격에 대비했다. 다행히 한 번도 사용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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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들거리는 검은 털과 묵직한 어깨 근육, 야생의 살기가 서린 눈빛이 정면으로 꽂혀왔다. 손에는 호신용 칼 한 자루 없었다. '이 자리에서 물어뜯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구나' 하는 원초적 공포에 다리가 돌처럼 굳었다. 길옆에 널브러져 있는 몽둥이라도 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천운이었을까. 곰 역시 사람의 인기척에 흠칫 놀랐는지, 아니면 우리 두 사람의 수적 열세에 겁먹었는지 잠시 콧김을 뿜더니 몸을 홱 돌려 숲 속으로 쿵쾅거리며 내달렸다. 녀석의 엉덩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우리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스팔트를 향해 질주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아찔한 조우 이후, 우리는 화장실에 갈 때조차 안전핀을 。검하며 곰 스프레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피로가 한계에 달했을 무렵 만난 원시 습지대의 '리어드리버 자연 온천'은 황야의 오아시스였다. 머리 위로는 서늘한 침엽수의 냉기가 내려앉고, 발밑에서는 40도를 웃도는 뜨거운 유황 온천수가 솟구치는 노천탕에 몸을 담그니 뼛속까지 밴 피로가 씻겨 나갔다.
▲ 리어드리버 자연온천?자연온천으로 40도의 뜨거운 온천수가 발밑에서 솟구친다. 온천의 영향으로 주변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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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부들부들, 식은땀 흘리며 통과한 5미터
전 세계 방랑자들의 이정표가 숲을 이룬 왓슨레이크의 '사인 포스트 포레스트'에 우리만의 흔적을 남기고 다시 북으로 달렸다.
그러나 유콘 준주의 주도인 화이트호스 초입, 마일스 협곡(Miles Canyon)에서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쳐왔다. 검붉은 현무암 절벽 사이로 에메랄드빛 유콘강이 맹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포효하는 절경이었다. 경치에 취해 강변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걷다 문득 발밑을 내려다본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풍경에 홀려 걷는 사이, 우리는 발을 헛디디면 끝장인 깎아지른 벼랑 끝 외길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길의 폭은 겨우 50cm 남짓. 그마저도 강 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부스러진 자갈들이 사정없이 미끄러졌다. 손으로 잡을 만한 나뭇가지나 바위 돌출부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발 아래 수십 미터 낭떠러지에서는 소용돌이 급류가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내며 집어삼킬 듯 굽이치고 있었다.
뒤로 돌아서기에는 발을 돌릴 디딤판조차 나오지 않는 완벽한 진퇴양난. 앞서 걷던 매부의 뒷모습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돌아본 그의 얼굴은 핏기가 하얗게 가신 잿빛이었다.
"진석 형, 절대 아래 내려다보지 마요. 벽에 붙어서 조금씩 기어가야 해!"
조금 넓은 평지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5m.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려 한 발자국을 떼는 것조차 지옥 같았다. 신발 바닥이 자갈을 긁으며 벼랑 아래로 돌멩이 몇 개가 허공을 가르고 떨어져 내렸다. 식은땀이 눈을 찔렀다.
죽음의 공포를 억누르며 바위벽에 배를 바짝 붙인 채, 한 뼘씩 기어가듯 그 5미터를 통과했다. 억겁처럼 느껴지던 시간을 지나 안전한 흙길을 밟았을 때, 두 사내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칠순의 인생길에서 수많은 풍파를 겪었지만, 이토록 적나라하게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순간은 없었다. 지금도 그 협곡의 물소리를 떠올리면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 마일스 협곡의 모습?거친 강물이 수직 절벽 사이를 흐른다. 절벽 위의 산책로를 걷다 무시무시한 벼랑 끝 외길로 들어서 버렸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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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오로라의 진실
협곡에서 혼비백산해 빠져나온 우리는 유콘 준주의 주도인 화이트호스에서 여장을 풀기로 했다. 이곳이 세계적인 오로라 관측 명소라는 이야기를 듣고, 밤하늘의 빛 공해가 닿지 않는 도시 외곽 깊숙한 숲속의 외딴 산장을 예약해 두었다.
산장에 들어서자 마치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오두막에 들어온 듯 아기자기한 온기가 가득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흑백 사진들을 둘러보니,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가 홀로 지켜온 집이었다. 지금은 독일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건너온 젊은 연인이 여름 3개월 동안 계절 노동자로 머물며 능숙하게 산장을 돌보고 있었다.
말도 통하고 마음도 통했던 우리는 저녁 식탁을 합쳤다. 타향 오지에서 만난 독일인 청년 커플과 나란히 서서 라면을 끓이고 팬을 달구며 친구처럼 요리를 함께했다. 숟가락을 부딪치며 낯선 언어로 유쾌한 수다를 나누는 사이, 낮 동안 벼랑 끝에서 곤두섰던 신경이 눈 녹듯 풀어져 내렸다.
문제는 잠자리였다. 방은 아늑하고 예뻤지만 침대가 널찍한 '더블 침대' 딱 하나뿐이었다. 칠순의 두 사내가 한 이불 아래 나란히 누워 자는 그림도 민망하거니와, 험한 잠버릇에 자칫 실수라도 할까 봐 서로 조심스러웠다.
서로 침대를 양보하겠다며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냈다. 천만다행으로 내가 져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거실 소파를 차지하고 누웠다. 새벽 1시 무렵,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갔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그 찬란한 초록빛 커튼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구름 같기도 하고 희미한 은하수 같기도 한 기다란 띠 하나가 하늘을 밋밋하게 가로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 오늘은 허탕이구나.'
지레 실망하며 다시 소파에 파묻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주방에서 마주친 독일인 커플이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어젯밤에 창밖 보셨어요? 드물게 진짜 오로라가 떴잖아요!"
순간 멍해졌다. 알고 보니 눈으로 직접 보는 실제 오로라는 방송 화면처럼 쨍한 형광 초록빛이 아니라, 어젯밤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그 희끄무레한 구름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날이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카메라 렌즈의 긴 노출값과 보정 기술에 속아 정작 눈앞의 진짜 오로라를 '흐린 구름' 취급해 버린 셈이었다.
화려한 빛의 군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인생 첫 오로라를 눈에 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신이 났다. 숲속 산장의 따뜻한 온기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트럭 시동을 걸었다.
▲ 동화 같은 화이트호스 산장?오로라를 보기 위해 도시 외곽의 산장을 예약했는데 마치 동화 속 오두막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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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지붕 위를 달려 마침내 북극의 관문으로
골드러시의 열기가 멈춰 선 서부극 세트장 같은 도슨시티에 도착했다. 이제 캐나다를 벗어나 알래스카 페어뱅크스로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카페리에 트럭을 얹고 유콘강을 건넜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한 길은 이름마저 거창한 '탑오브더월드 하이웨이(Top of the World Highway)'였다.
산자락 계곡을 따라가는 일반 도로와 달리, 이 도로는 산등성이 가장 높은 능선 꼭대기만을 타고 달린다. 말 그대로 '세상의 지붕 위'를 질주하는 형국이었다. 차창 좌우로는 수목 한계선을 훌쩍 넘겨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하고 장엄한 북방의 산맥들이 발아래로 거대한 파도처럼 물결쳤다.
1년 중 여름 몇 달만 통행을 허락한다는 거친 비포장 자갈길. 트럭 바퀴가 굵은 돌멩이를 튕겨낼 때마다 차체가 덜컹거렸지만, 지평선 끝까지 막힘없이 터져 나가는 파노라마 속을 질주하는 해방감은 형언할 수 없이 압도적이었다.
▲ 구름 위를 달리는 '탑오브더월드 하이웨이'. ?수목한계선을 훌쩍 넘긴 능선 꼭대기를 따라 지평선 끝까지 막힘없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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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 능선 한가운데 자리한 외딴 국경 검문소를 통과해 마침내 우리는 알래스카 내륙의 심장, 페어뱅크스에 닿았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나온 지 13일 만이었다. 섭씨 40도의 사막에서 출발해 만년설과 타이가 숲을 뚫고, 야생 곰과의 식은땀 나는 조우와 마일스 협곡의 아찔한 벼랑 끝을 넘어 달려온 5000km.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서막에 불과했다. 페어뱅크스의 대형마트에서 사 온 연어와 새우로 입 호사를 누리면서 우리는 트럭 적재함의 비상 연료통과 발전기를 다시 。검했다. 내일부터는 나무 한 포기 살지 않는 진짜 동토, 문명이 완전히 끊기는 악명 높은 비포장 '돌턴 하이웨이'를 뚫고 0도의 북극해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진짜 야생의 시험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알래스카로 진입?캐나다의 '탑오브더월드 하이웨이(Top of the World Highway)' 를 지나 알래스카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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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칠순의 두 사내가 35일간 1만 4천 킬로미터를 달린 알래스카 로드트립 연재입니다. 캐나다 유콘의 험로를 뚫고 페어뱅크스에 도착한 두 노장의 여정은, 다음 편에서 악명 높은 비포장 '돌턴 하이웨이'를 거쳐 얼어붙은 북극해 입수로 이어집니다
릴게임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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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저 거창한 '탑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