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호황으로 경제는 성장하지만 일자리는 그만큼 늘지 않고,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소득의 비율은 오히려 줄어드는 ‘성장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사람을 적게 쓰는 반도체 산업에 성장이 집중되면서 경제 성장의 성과가 고용과 임금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경제자문회의는 26일 서울 중구 페럼타워에서 ‘AI 대전환 시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역량 개발과 소득 보장 중심으로’를 주제로 공개 포럼을 열었다.
◇반도체만 성장, 노동 몫은 뒷걸음질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반도체 등 전자 부품 산업의 성장이 경제 전체의 고용과 소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반도체 산업은 생산 규모에 비해 사람을 적게 쓰는 대표적인 업종이다. 2010~2025년 이 업종의 실질 부가가치는 3배로 늘었지만 근로자 수는 17% 증가하는 데 그쳤다. 기업들이 반도체를 생산해 벌어들이는 돈은 크게 늘었지만,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반도체 산업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지난해 상반기 국내총생산(GDP)의 8% 수준이던 전자 부품 업종의 비율은 올해 상반기 21%로 뛰었다.
반면 GDP에서 임금·급여 등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지난해 2분기 47.9%에서 올해 2분기 41.1%로 낮아졌다. 2010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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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등 전자 부품 업종을 제외하면 노동 몫은 50% 안팎으로 전년과 비슷했지만, 반도체 중심의 성장으로 경제 전체에서 노동자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진 셈이다. 기업 이익이 늘어도 그 혜택이 다른 기업과 노동자에게 충분히 퍼지지 않는 구조라는 분석이다.
경제성장률 대비 취업자 증가율을 뜻하는 고용 탄성치도 올해 상반기 0.10으로 과거 평균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그만큼 늘지 않는다는 의미다.
AI 확산은 청년 취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AI 노출도가 높은 직종에서 15~29세 청년 고용은 2022년 11월 이후 약 17% 감소했지만 다른 연령대에서는 뚜렷한 감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업들이 기존 직원을 해고하기보다 신규 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청년들이 경력을 쌓을 기회부터 사라지고 있다.
또 기자·번역가·작곡가·영상 제작 등 프리랜서 시장에서는 AI로 초급 일감과 신규 진입 기회가 줄어들고, 기존 종사자들도 단가 하락 압박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 연구위원은 AI로 인한 충격이 실업뿐 아니라 일감과 소득 감소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현행 고용보험으로는 이를 충분히 보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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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호황 재원, 사람 투자에 써야”
이런 경제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인재 양성과 사회안전망 강화 등 대안을 제안했다.
여유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AI로 일자리와 소득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지만 실현 가능한 대응책이 부족한 ‘대안의 공백’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는 저소득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사회보험료 지원을 확대하고, 기업의 초과 이윤 일부를 사회보험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미래대응기금의 일정 몫을 활용해 사회안전망 확대를 위한 전용 국부펀드를 조성하자는 주장도 내놨다.
노동연의 장 연구위원은 “AI로 인한 신규 채용 감소, 고용 불안정에 대응하려면 사람에 대한 투자가 다음 성장의 기반이 돼야 한다”며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수를 활용하는 미래대응기금에서 인재 양성 몫을 우선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또 중소기업의 AI 전환(AX) 지원도 설비 도입과 기존 직원 교육에 그치지 않고 청년 신규 채용과 중장년 숙련 인력 활용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청년에게는 일하면서 경력을 쌓을 기회를 주고, 중장년에게는 경험과 기술을 전수하는 역할을 맡기는 방식이다. 고용보험 역시 사업주 신고가 아닌 국세청 소득 자료를 기준으로 가입 자격을 부여해 프리랜서와 플랫폼 노동자까지 보호하도록 개편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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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찬섭 동아대 교수도 국세청 신고소득을 활용해 사회보험 가입 자격과 보험료 납부 이력을 관리하고, 기업의 기여금을 목적세 방식으로 전환하면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줄이고 재정을 확충할 수 있다고 했다.
직업훈련 기간의 소득을 보장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는 직업 훈련과 육아·돌봄 기간에 생활비를 지원하는 ‘국민활동급여제도’를 제안했다. 1단계 ‘국민역량급여’로 재직·이직자와 취업 준비 청년에게 생애 최대 12개월간 중위소득의 60~70%를 지급하고, 2단계 ‘국민활동급여’에서 육아·돌봄까지 확대해 소득비례 보충급여를 포함해 최대 24개월 지원하는 방식이다. 홍 교수는 2027년 제도 기반을 마련하고 2028~2029년 시범 운영을 거쳐 2030년 전면 시행하는 일정을 제시했다.
최영준 연세대 교수도 직업 훈련이 실제 일자리로 이어지도록 교육 내용과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 발전의 이익을 사회 전체로 확산하기 위해 현금 급여와 사회보장, 공공 서비스 등을 통해 국민이 공동으로 보장받는 ‘사회적 임금’을 높여야 한다고도 했다.
김성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설비 투자와 사람 투자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며 “AI 시대의 성과를 인적 역량 강화와 사회 안전망 확충에 재투자하고 그 투자가 새로운 성장의 기반이 되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국민경제자문회의는 이날 논의된 정책 제안을 바탕으로 AI 시대에 대응하는 포용적 성장 방안을 구체화해 향후 대통령 자문과 정책 제언에 반영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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