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한, 지금의 나를 만든 첫 번째 책은 만화가 문정후의 『영웅 초한지』였다. 이제 막 줄글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는데 이 책에 홀딱 빠져 늘 손에 쥐고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유방과 항우, 장량과 한신, 역이기와 괴철 등 저마다 다른 재주를 가진 인물들이 자웅을 겨루는 모습이 시종일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시만 해도 초한지 속 이야기가 모두 실제 역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후로 ‘역사’라고 라벨링이 된 모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뛰놀기 좋아하던 어린이가 주구장창 방에 주저앉아 두껍고 긴 책을 읽기 시작하자, 부모님도 기뻐했다. 책이라면 원 없이 사주셨고,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다녀오라며 한없이 자유를 허락했다. 아마도 거칠게 놀다 무릎이 깨지는 것보다 같은 책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역사책을 읽고 그 속의 장면들을 상상하는 건 내 인생에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한동안은 내가 읽은 초한지가 가공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오히려 정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것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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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에는 언제나 기록자의 관。이 개입하게 되고 공란이 남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 공백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다는 사실을 차츰 깨달았다.
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여자, 기록을 가로채다』 역시 그 공란을 파고들고 있다. 특히 기획의 변을 들여다보면 이 시리즈의 의도를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사의 대부분 기간에 절대다수의 여성이 문맹이었기에 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료에 구속되기 마련인 역사학자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한 채, 남성과 가부장적 국가의 발화를 통해 들을 수밖에 없다. 이는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관。과 담론 속에서 여성들을 조명하는 위험에 놓이게 된다. (중략) 필자들은 사료의 행간, 사료와 사실의 균열 지。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이를 통해 상류층 남성과 가부장적 국가의 기록이 담지 않은/못한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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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익히 접해온 역사책과는 조금 다르다. 사료를 기반으로 기록의 공란에 놓인 삶을 적극적으로 추측한다. 기존 기록에서 절부나 열녀로 일축되었던 여성들을 호명하며 기록자의 시선과 그것에 가려진 삶을 읽어내는 데 집중한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재혼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아내로 규정된 고려 원 간섭기의 조씨를 전쟁 생존자이자 집안 재산을 영민하게 관리한 수완가로, 함흥의 이름난 기생이었던 가련을 존재 증명과 인정 욕구에 골몰했던 정치 논객이자 시 수집가로 다시 조명한다. 두 여성의 삶을 새롭게 읽어내는 과정에서 역사학자가 사료를 어떻게 읽고, 의심하고, 해석해 나가는지까지 엿볼 수 있다.
이제는 과거의 사실관계만큼이나 짧은 기록 속의 주변 인물과 풍경, 상황의 면면들이 궁금하다. 그러던 참에 만난 조씨와 가련의 이야기가 무척 반가웠다. 덕분에 그 허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했다. 동시에 역사의 중심에서 호명되지 않았던 다른 여성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새로운 허기를 남겼다. 그 허기가 이 시리즈의 다음 책으로 자꾸만 나를 이끈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저서로는『밍키』가 있다.
. 남편이 죽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