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은 한국교회를 넘어 해외 이단 연구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특히 일본의 대표적 복음주의 목회자이자 이단 연구가인 모리야마 사토시(1908~1996) 목사와 가깝게 지냈다. 모리야마 목사는 일제강.기 자국 정부의 폭거를 일본 사회에 고발하다 옥고를 치른 ‘시대의 양심’이었다. 우리나라 해방 뒤엔 한·일 친선에 힘썼으며 목포 공생원을 지원하며 한국 고아를 도왔다. 식민지 시절 한국에 행한 전쟁범죄를 일본이 회개해야 한다고 지속해 주장한 친한파 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1년에 수차례 한국을 찾아 공생원의 고아들을 돌보는 동시에 일본에서 활약하는 이단 단체의 실체를 강연했다. 아버지는 1977년 모리야마 목사를 초청해 전국 순회 집회를 마련했다. 그는 집회에서 여호와의증인과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 창가학회, 통일교 등 일본 사회에서 활동하던 이단 집단을, 아버지는 한국의 이단 집단에 관한 강의를 맡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 이단 집단의 간부가 집회장에 사람을 동원해 방해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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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훗날 회고록에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회가 열린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경비를 섰다”고 적었다.
서울 승동교회와 대전고등학교, 부산 영락교회 등 도시 10곳에서 열린 집회에서 모리야마 목사는 생생한 비유를 들어 이단 집단의 위험성을 경고했다고 한다. 그는 강연 중 1000원 지폐를 내보이며 “퇴계 이황 선생 아래 무궁화 꽃이 네 송이 그려져 있다. 만약 세 송이나 다섯 송이가 그려져 있으면 위조지폐”라며 “원본과 1%만 달라도 위조지폐가 되듯 진리도 마찬가지다. 불순물이 1% 섞이면 더는 진리가 아니다”고 역설했다.
부인과 딸 모두 목회자인 모리야마 목사는 아버지의 사역을 항상 응원했다. 아버지가 85년 5월 폭탄 테러를 당해 입원했을 때도 그는 일본에서 성금을 모금해 직접 전달했다. 1년 전에는 일본 내 이단 관련 집회에 아버지를 초청하기도 했다. 국내외 활동 폭이 넓은 사회 인사였지만 매우 검소한 삶을 사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본 집회 기간 목사님 댁에서 머물렀는데 자가용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셨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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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집회 중 곁에서 본 모리야마 목사는 내가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신실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경 상고에 시간을 보내는 경건주의자였다. 이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아버지는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김용기 장로와도 인연이 깊었다. 아버지 사역의 중요성에 공감한 김 장로는 78년 1월 강원도 원주 제2가나안농군학교에서 ‘제1회 목회자 수련회’를 열고 참가자들에게 농촌 계몽 운동 및 이단 강연을 마련했다. 선착순 100명만 모집하려 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몰렸고 이후 수련회가 두 차례 더 열렸다. 두 분의 전폭적 지원과 신뢰는 아버지의 사역에 큰 힘이 됐다.
그렇지만 항상 집회에 인파가 모인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같은 해 6월 서울 은평구 한 수양관에서 ‘교회 갱신과 신흥종교의 종합적인 분석’이란 주제로 목회자 수련회를 열었다. 아버지뿐 아니라 한완상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 문상희 연세대 신과대 교수 등이 강사로 나섰지만 신청 인원은 40명에 그쳤다. 한국일보 등 교회 안팎의 언론은 이 주제를 주목하며 관련 내용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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