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반장 1958'에 특별출연하는 최불암. /MBC
35년 만에 박 반장의 바바리코트를 다시 들었다. 2024년 ‘수사반장 1958’에 특별출연한 최불암은 같은 시기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에서 후배들에게 연기자의 도리를 당부했다. “국민이 가야 할 길 위에 가시덤불이 있으면 그걸 치우는 게 광대 정신.” 반세기 넘게 국민의 사랑을 받은 배우가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이었다.
‘수사반장’의 박영한 반장과 ‘전원일기’의 양촌리 김 회장, ‘한국인의 밥상’의 길잡이로 시청자 곁을 지켜온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87)이 29일 별세했다. 고인이 이사장을 맡았던 사단법인 제로캠프에 따르면 최불암은 이날 오후 10시 30분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세상을 떠났다.
수사반장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사람을 돌봤다. 박 반장은 범인을 쫓으면서도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사정을 살폈고, 김 회장은 자식들을 꾸짖다가도 그들의 앞날을 걱정했다. 말년에는 배역을 벗고 자신의 이름으로 전국의 밥상 앞에 앉았다. 경찰서에서 농촌 마을로, 다시 산골과 어촌의 부엌으로 무대는 달라졌지만 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그 곁에 있었다.
1971년 시작한 MBC ‘수사반장’은 최불암의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한 작품이었다. 박영한 반장은 범죄 앞에서 단호했지만, 사람의 불행 앞에서는 마음 아파하는 형사였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절, 드라마는 사건을 통해 성장의 그늘을 비췄다. 최불암의 묵직한 표정과 목소리는 그 중심을 잡았다.
황금성오리지널
1989년 막을 내린 뒤에도 박 반장은 그의 이름을 대신하는 배역으로 남았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송된 ‘전원일기’에서는 양촌리 김 회장으로 시청자들과 함께 나이 들었다. 농촌의 변화와 집안의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가족과 이웃을 품는 어른이었다. 김혜자와 오랫동안 부부로 호흡을 맞추며 만들어낸 생활의 표정은 ‘국민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이어졌다.
최불암(왼쪽)과 김혜자가 나란히 등장한 1980년대 ‘전원일기 ’장면.
그에게 연기는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었다. ‘전원일기’가 1000회를 맞은 2001년, 그는 인터뷰에서 “좋은 배우가 되려면 사람을 연구해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이 먼저 사람이 돼야 합니다”라고 했다. 익숙한 배역에 안주하는 것도 경계했다. 인요한과의 대담에서는 한 인물을 연기한 뒤 그 배역에서 비롯된 습관을 털어내야 다음 인물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1년부터 14년간 이끈 KBS ‘한국인의 밥상’은 그런 태도가 드러난 또 다른 무대였다. 음식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그 음식을 만들고 먹어온 이들의 생애를 들었다. 밥상에는 노동과 가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의 기억이 담겼다. 최불암의 익숙한 목소리는 그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전했다. 지난해 4월 700회 방송에서 후배 최수종에게 진행을 넘기며 그는 “돌아보니 모든 순간이 저에게도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고 인사했다.
화면에서 얻은 신뢰는 어린이 후원으로 이어졌다.
게임장 24
초록우산에 따르면 1981년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이 금동이를 입양한 에피소드가 계기였다. 방송 뒤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고, 재단 관계자의 권유로 실제 어린이 후원을 시작했다. 동료 배우들도 나눔에 동참했다. 1985년 후원회장을 맡은 그는 국내외 아이들을 만나며 활동을 이어갔다. 초록우산은 올해 그의 나눔을 45년의 여정으로 소개했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에도 기꺼이 자신을 내놓았다. 1990년대 유행한 ‘최불암 시리즈’에서 그는 엉뚱하고 순박한 농담의 주인공이었다. 근엄한 어른의 얼굴이 유머집에 등장하고, 특유의 ‘파하’ 웃음은 성대모사의 소재가 됐다. 그는 방송에서 이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콩트를 직접 선보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웃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국민 아버지' 최불암
1959년 연극 ‘햄릿’으로 연기를 시작한 최불암은 1967년 KBS 특채 탤런트로 TV에 진출했다. 20대에 ‘수양대군’의 노년 김종서를 맡았고, 40대에는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이승만을 연기했다.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왕십리’ ‘바람불어 좋은날’ 등에서도 활약했다. 1992년 통일국민당 비례대표로 제14대 국회의원이 됐으며, 이후 연기 활동으로 돌아왔다. 2014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난해 허리 수술 뒤에는 재활 치료에 힘썼다. 올해 5월 그의 연기 인생을 돌아본 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가 방송됐지만, 치료에 전념하면서 직접 카메라 앞에 서지는 못했다.
유족으로는 아내인 배우 김민자와 아들 동녘, 딸 동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장례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치러진다.
집안의 크고 작은